“그래도 너무 극단적인 건 좀 그렇잖아.”
살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가족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올 때, 친구와 사회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 혹은 뉴스를 보며 마음속으로 판단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안의 양쪽 입장이 팽팽히 맞서면, 그 중간 지점쯤에 진실이 있겠거니 생각한다. 마치 중간이 곧 합리성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간이라는 선택이 언제나 현명하거나 공정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타협’이야말로 더 큰 착각일 수 있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할 주제, 바로 중간 지점 착각(Middle Ground Bias)이다.
‘중간’은 정말 합리적인가? – 중간 지점 착각의 개념과 심리
중간 지점 착각이란, 서로 다른 두 주장 사이에서 단순히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거나 공정하다는 인지적 오류를 말한다. 이 편향은 사람들의 심리 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갈등을 피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와 대립하거나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건 피곤하고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애매하게 중립을 지키거나, 둘 다 일리가 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균형 잡힌 시선’, ‘양비론적 태도’가 지적인 인상이나 포용력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배경 덕분에 중간 지점을 택하면 마치 더 성숙한 태도를 취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것이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자주 간과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러한 심리는 학교나 직장에서 “모두의 입장을 고려하자”는 문화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협업과 팀워크를 강조하는 환경에서는 강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해결책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고, 그런 상황에서는 ‘애매한 합의’보다는 분명한 원칙이 더 낫다.
착각이 실제로 문제가 되는 순간들 – 사례 중심
실생활에서도 이 착각은 다양한 문제를 낳는다. 대표적인 예가 백신 관련 논쟁이다. 한쪽에서는 “백신은 무조건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백신은 위험하니 맞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반대한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중간에서 “맞긴 맞되, 너무 자주 맞지는 말자”는 식의 타협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된 데이터는 백신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안전하고, 중대한 부작용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럴 때 ‘중간’은 사실 근거 없는 불안을 받아들인 결과일 뿐이다.
또 다른 사례는 기후변화에 대한 언론 보도다. 과학계에서는 기후변화가 인간 활동에 의해 발생한다는 데 압도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언론은 ‘균형 잡힌 보도’라는 명목으로 소수의 부정론자 주장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룬다. 그 결과, 독자들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모르겠으니 적당히 믿자”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중간을 택했지만, 그것은 과학적 사실을 외면한 태도일 수 있다.
윤리적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명백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에서 “둘 다 잘못했다”는 식의 반응은 중립이 아니라 무책임에 가깝다. 가해자 편에 서지 않았다고 해서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중립이라는 선택이 방관자적 태도로 보일 수 있다. 미투 운동 초기에도 이런 반응이 많았다. 가해자 측의 입장을 들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인 지지라며, “한 발 물러서서 보자”는 식의 중립론이 오히려 2차 가해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왜 ‘중간’이 항상 답이 아닌가? – 논리적 함정 분석
문제는 중간이라는 위치 자체에는 아무런 논리적 정당성이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2+2는 4”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2+2는 6”이라고 말한다면, 그 중간인 “2+2는 5”가 맞는 건가? 당연히 아니다. 이처럼 어떤 주장이 타당한지 아닌지는 그 내용과 근거를 바탕으로 평가해야 한다. 단순히 극단을 피하고 싶다는 이유로 중간을 택하는 것은 논리적 게으름에 가깝다.
사람들은 종종 “모든 의견에는 일리가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물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모든 의견이 동일한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과학적 근거, 역사적 사실, 윤리적 판단 같은 영역에서는 특정 입장이 명백히 우위에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간’을 택함으로써, 책임 있는 판단을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문제는, ‘중간’이 항상 고정된 위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사회 전체가 점점 더 극단적인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중간의 기준도 함께 이동해 버린다. 결국 중간을 택한다는 건, 어쩌면 사회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일 수도 있다.
중간 지점 착각을 피하려면 –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
이런 편향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자신의 사고방식을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사안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그 중립이 과연 논리적으로 정당한가를 물어봐야 한다. “나는 양쪽을 다 본다”고 말하기 전에, 각각의 주장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져보자. 감정이 아닌 정보와 논리를 바탕으로 판단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또한, 때로는 분명한 입장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 입장이 설령 불편하고,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중간을 택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엔 명확한 판단과 용기가 더 중요하다. 그래야 진짜 균형 잡힌 시선, 책임 있는 선택이 가능하다.
비판적 사고는 결코 ‘비판만 하는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주장과 정보의 질을 평가하는 능력이자, ‘생각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습관이다. 내가 지금 선택한 그 ‘중간’이 정말 논리적으로 정당한가? 아니면 그저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회피일 뿐인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가끔 우리는 ‘중간’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안전함은 때때로 진실에서 멀어지는 길이 될 수 있다. 타협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명확한 판단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중간 지점이 아니라, 진짜 중심을 찾는 안목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 중심은 언제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가까운 쪽에 있다.
'생각의 함정들 - 인지편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감 격차 - 타인의 감정을 과소평가하는 심리 (0) | 2025.04.26 |
---|---|
내집단 편향 - 우리 편에 유리하게 생각하는 본성 (1) | 2025.04.25 |
최신성 효과 - 최근 정보에 과도하게 끌리는 이유 (1) | 2025.04.23 |
변화맹시 - 점진적인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는 심리 (1) | 2025.04.21 |
목표 지향 편향 - 목표에 집착하며 놓치는 진실 (0) | 2025.04.20 |
시간 할인 - 단기 보상이 장기 이익을 압도하는 심리 (1) | 2025.04.19 |
허위 일관성 효과 - 모순된 정보를 일관되게 보이려는 노력 (0) | 2025.04.18 |
심리적 거리 효과 – 멀리 있는 문제는 쉽게 느껴지는 이유 (0) | 2025.04.17 |